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문단 편집) ==== 본격적인 준전시 태세 ==== 이 사건에서 살해당한 미군 장교는 미국의 장교이기 전에 UN군 소속의 장교들이었다. 이것의 의미는 단순히 미국과 북한의 문제라고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고 이 사건이 '''국제적인 대도발 사건'''이 되었다는 의미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더라도 문제가 되었을 사건이 말도 안되는 명분으로 말도 안되는 과정을 거쳐서 터졌으니 사건이 유하게 해결될리가 없게 된 것이다. 이 사태로 미국은 매우 분노했다. 일반 병사도 아니고 장교를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참혹하게 살해했고 미국은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UN군 사령관이자 미 육군의 [[대장(계급)|대장]]이었던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휴가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건의 보고가 자신에게 올라오자마자 [[여객기|민항 여객기]]도 아니고 군의 [[수송기|일반 수송기]]도 아닌 [[전투기]]의 후방석에 탑승하여 급히 [[한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에 입국한 스틸웰 대장은 즉시 회의를 소집한 뒤,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 [[데프콘]] 3[* 훈련(연습) 용어로는 '라운드 하우스'라고 불리며, 영내에 있는 모든 물자를 방치품/적재품/파기품으로 분류하고 "당장이라도 막사 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 을 말한다.]를 발동시키자는 합의를 내렸다. 한국에 주둔중인 UN군과 미군 뿐만이 아니라 보고를 받은 미국 본국의 중앙정부도 좌시하지 않고 강경하게 대처하기로 결의했다. 당신 미국 정계는 좌우나 정당 및 파벌을 가리지 않고 더 이상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위신이 깎여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전까지 전쟁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미군의 자존심이 바닥을 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미국 대통령|대통령]]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가뜩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약하게 보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기에, 이런 비판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포드 대통령은 즉각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시간으로 8월 18일 오후 3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의 주재로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국방]]장관의 대리인 국방[[차관]] 윌리엄 클레멘츠, [[해군참모총장]]인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 대장 제임스 핼러웨이 [[제독]], 대통령 안보 부보좌관 윌리엄 하이랜드 등이 참여한 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키신저 장관은 현장 사진을 보고 극도로 분노했고 사진에서, 북한군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며 북한군을 권총으로 쏴죽였어야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미국 중앙 정보국|CIA]]에서는 이 도발이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참석자들도 동의했다. 키신저는 북한이 미국인 2명을 때려죽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라고 소리쳤고, 회의장을 나오면서 빨갱이들의 피를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고 말하는 등 미국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렇지만 판문점에서 일어난 사건만으로는 전면전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특히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우려도 있어 스틸웰 장군은 우선 사건의 원인이 된 [[미루나무]]를 자르고, 이에 북한측이 추가 도발을 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결국 대안이 승인되고 데프콘 등급이 상향되었다. 회의를 마친 키신저 장관은 [[중국]]을 통해 북한 측에 조용히 있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란 경고를 보냈다. 8월 19일에 들어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으나, 북한측은 여전히 경비장교 회의를 운운하며 사건을 덮으려 했다. 결국 군사정전위원회와 경비장교회의가 동시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UN군은 김일성에게 보내는 UN군사령관의 메시지를 통해 군사 정전 위원회 본회의에 당장 나오라는 강경한 최후 통보와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여전히 억지 주장을 계속하며 되려 사건 가담 주모자들을 처벌하라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당연히 협상은 결렬되었고, 스틸웰 장군은 그날 바로 워싱턴 국가안보회의에 데프콘 3를 발동하겠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국내에서 처음으로 데프콘 3가 발령되었다. 이로 인해 [[6.25 전쟁]] 이후 최초로 주한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 체제에 돌입했으며,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준전시 체제)를 발동, 전군 완전 무장을 지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